시황제는
폭군이었을까, 아니면 유능한 군주였을까? 이런 논의는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해서 유가의 서적을 불태우고 유자를
구덩이에 묻었으며 또는 만리장성 등의 대토목공사에 민중을 혹사시킨 것 때문에 폭군이라 한다. 한편으로는 전국의 분열시대를 종언시켜 통일을
실현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또한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국역대 왕조의 기본 정치체제를 구축한 점에서 보면 유능한 군주이다. 이러한 종래의
이미지에 더하여 새롭게 발견된 동시대 사료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유가탄압의 폭군상과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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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는 폭군이었을까, 아니면 유능한
군주였을까? 이런 논의는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해서 유가의 서적을 불태우고 유자를 구덩이에 묻었으며 또는
만리장성 등의 대토목공사에 민중을 혹사시킨 것 때문에 폭군이라 한다. 한편으로는 전국의 분열시대를 종언시켜 통일을 실현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또한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국역대 왕조의 기본 정치체제를 구축한 점에서 보면 유능한 군주이다. 이러한 종래의 이미지에 더하여 새롭게
발견된 동시대 사료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유가탄압의 폭군상과는 다른 황제상을 말해주고 있다. 동시에 통일사업을 강권으로 실현시킨
황제보다도 정복하면서도 동방(육국의 지역)의 지역 문화를 지속적으로 두려워했던 인간 시황제가 떠오른다.
[본문 11p]
대신들은
박사들의 지혜를 빌려 오제(五帝)보다도 오래된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의 권위를 원했고 그중에서 태황을 선택했다. 진왕의 제호
요구와 대신의 태황 제안에 차이가 느껴진다. ‘황’도 ‘제’처럼 하늘을 의미하며 대신들은 ‘제’보다도 ‘황’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하의
의견에 대해 진왕은 역시 제(帝)라는 호를 고집하여 태황의 태를 버리고 황을 남겨 황과 제를 조합한 황제라는 칭호를 스스로 선택하고 마지막에
재가하였다. 그 외에 제(制), 조(詔)와 자칭 짐(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하 의견에 따랐다.
이처럼 신하의 제안과 진왕의 강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황제라는 칭호는 탄생하지
못했다.
[본문 121p]
시황
34년(B.C.213)의 분서령은 다음과 같이 내려졌다. 실제로 내용을 제안한 사람은 이사이다. 진의 역사 기록을 제외하고 사관(史官)에 있는
문서를 전부 소각하라. 지금의 진의 기록은 필요하지만 과거 전국 육국의 사기(史記)나 옛날의 하(夏) · 은(殷) · 주(周) 3대 왕의 기록
등은 현실 정책에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박사들과 같은 관官이
서적을 소장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민간에 소장하고 있는 시(詩, 『시경』) · 서(書, 『상서』) · 백가(百家)의 책은 모두 군수(郡守)에게
내놓았으며 군위(郡尉)에게 정리하여 소각하게 하였다(그림 6-7). 이사가 두려워했던 것은 박사들이 각각 제자백가를 배우는 것은 상관없지만
밖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본문 174p]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조정의 출생 ―출생의 비밀(1세)
제2장 진왕 즉위 ―제왕 탄생의 배경(13세)
제3장 노애의 난 ―혜성은 말한다(22세)
제4장 암살미수 ―자객의 인물상(33세)
제5장 황제순행 ―‘통일’의 실상(39세)
제6장 중화의 꿈 ―장성과 분서갱유(47세)
제7장 제왕의 죽음 ―유언의 진상(50세)
제8장 제국의 종언 ―영원한 시황제
에필로그 ―진의 수도가 불타오르다
역자 후기
인물소개
참고사료 문헌
시황제 관계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