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작 소개-

현대 한반도와 극동의 구도를 확립한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기동전!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공세이자 소비에트가 기획한 최대 규모의 공세, 그리고 현대 한반도 분단 구도의 직접적 발단이 된 1945년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
1983년 당시 미 육군 부설 외국군 연구소에 소속된 러시아어 학자였던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소련군이 뒤늦게 대일 전선에 참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한 달 동안 막대한 수적 우위만을 앞세워 피폐한 일본군을 몰아냈다는 기존의 통념을 소련과 일본, 양측의 다양한 1차 사료와 정밀한 지도, 도표들을 통해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을 상대하며 급격히 발전한 소련군이 기존의 체제를 고수한 일본군을 상대로 만주라는 방대하면서도 가혹한 환경 하에서 어떻게 싸웠는가를 탁월하게 재조명한 이 저작은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1945년 만주전역을 다룬 가장 뛰어난 연구로 인정받고 있다.
1983년에 출간된 초판을 옮긴 국역판에는 저자가 한국 독자들을 위해 새롭게 쓴 서문과 만주전역에 대한 연구가 걸프전 당시 미국 육군에 끼친 영향에 대한 짧은 해설이 함께 포함되었다.
 
 
-해외 서평-

“나는 ‘8월의 폭풍’이 만주 전역에 대한 영어권 연구의 표준이 되리라 믿는다.”
-Jack N. Merrit

“출간 후 30년이 지났지만, ‘8월의 폭풍’은 여전히 만주 전역을 포괄적으로 해설하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Philip Ufnowski

“낡은 교리가 아니더라도 일본인들은 소련을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통상적인 정면 공격에 대비했고,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은 모든 면에서 일본군을 압도했다. 저자의 언급과 같이 만주 전역을 통해 교훈을 얻지 않는 이들은 또다른 일본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Dave Schranck
“소련의 작전과 지휘에 관한 매우 기술적인 해설을 담은 책이다. 이 기록들은 NATO를 상대하던 소련군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사막의 폭풍 작전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 역시 유익했다.”
-Daniel Carey
 
 
목차
1. 만주 전략 공세를 위한 준비
2. 작전 지역
3. 일본군의 준비와 작전기획
4. 소련군의 조직과 편제
5. 만주 작전 전야의 소련군 공세 이론
6. 소련군의 작전 준비와 작전 시행
7. 자바이칼전선군의 공세
8. 제1극동전선군의 공세
9. 제2극동전선군의 공세
10. 공세 분석
11. 결론
 

본문 미리보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작전에 대한 –특히 만주 전역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역사와 과거사 전반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소련군의 전훈에 대한 우리의 편향된 무지를 잘 보여준다.”
 
“소련 측의 추산에 따르면 1945년 8월에 관동군(한반도 주둔군 포함)의 전력은 3개 방면군과 1개 독립야전군, 1개 항공군, 쑹화 해군 전단 등에 소속된 31개 보병사단, 9개 보병여단, 2개 전차여단, 1개 특수목적여단이었다. 소련군은 이 부대들이 전차 1,155대, 야포 5,360문, 항공기 1,800대를 보유했다고 단언했다. 여기에 더해 8개 보병사단, 7개 기병사단, 도합 14개 보병여단과 기병여단을 보유한 만주국군도 있었다.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에는 제5방면군 소속의 3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여단이 배치되었다. 전체 전력은 120만 명이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에서,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로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소련군은 전술적으로도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방법을 사용했다. 소련군은 강력한 공병 및 화력 지원을 받는, 임무지향적인 소규모 돌격집단을 사용했으며, 이는 보병의 인해전술 돌격과 같은 소련군에 대한 보편적 인상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다. 이런 돌격집단들은 인해전술보다 훨씬 방어하기 어려움을 입증했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인력 소모보다 기계화와 화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일본군은 아마 소련이 1939, 1941, 1942년에 빈번히 사용한 인해전술에 대한 외국 자료(아마 독일과 핀란드에서 얻었을 듯하다)에 주목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소련군이 인력 의존을 감소시키고 소련군 지휘관들이 화력 운용과 전차 및 돌격포의 기동 전술을 발전시켰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소련군이 사용하지 않게 된 전쟁 초기의 전술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