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운명의 날〉
처음 그녀와 만났다.
조금씩 쌓여가는 작은 의문들이 풀렸을 때,
뜨거운 감동이 밀려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의사의 꿈을 잃어버린 의대생, 도키타 슈.
어느 날 그는 학교 옥상에서 우연히 길을 잃었다는 여성, 세이케 사야코를 만난다.
“내일부터 저의 과외선생님이 되어주세요.”
그녀의 밝은 태도, 천진난만함, 신비로움에 점점 이끌리는 슈.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녀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는데…….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우수상을 수상한
젊은 실력파 작가 츠지도 유메의 야심작!
책 속으로
“저기, 죄송한데요.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뒤에서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와, 나는 철망을 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나랑 조금 떨어진 옥상 한가운데에 하늘하늘한 복숭아색 치마를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당황한 나는 여성을 향해 돌아섰다. ---p. 17
완전마비.
장애등급분류에 사용하는 단어다. 기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뜨끔, 가슴이 또 한 번 아파왔다. 아까보다 강해 헉, 놀라게 만드는 아픔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나을 가능성은 쭉 제로에 가깝다.
그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말았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p. 36
사야코는 건반 중앙으로 손을 뻗어- 레, 라, 시, 파, 솔, 레, 솔, 라- 캐논의 베이스를 이루는 음을 천천히 연주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누르고 있는 건반이 보이기 때문에 나라도 음을 식별할 수 있다.
“캐논의 처음 부분은 보통 악보라면 왼손은 이 정도밖에 연주 안 해요. 하지만 곡을 전부 왼손으로만 치려고 하
면 전혀 달라져서- ”
사야코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 하얀 손을 내 눈앞에서 활짝 펼쳤다.
“- 대체로 새끼손가락이랑 약지로 저음이나 화음을 쳐요. 남은 세 손가락은 멜로디를 치고요.
하지만 말이 쉽지, 웬만해선 항상 이렇게 치기가 쉽지 않아서 치고 싶은 음의 균형을 잡아가며 손가락이 엉키는 건 바꿔줘요.
기본적으로는 높은음과 낮은음 사이를 교대로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점프 뛰는 거예요.”
사야코는 다섯 손가락을 따로따로, 훌륭할 정도로 능숙하고 매끄럽게 움직이는 시범을 보였다. ---p. 56-57
피아노 카페라는 편안한 공간에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가운데 우아하고 자유로운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게 도대체 얼마만일까? 이런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그런 적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p. 93-94
심플하고 느긋한 곡조가 관객을 무심의 경지로 데려간다.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는 자각조차 없어져 눈앞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고 있는 음을 그저 끊임없이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문득 어린 시절 일을 떠올린다. 언제였더라.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 이렇게 세 명이서 원반장난감을 던지며 놀았다.
녹색 잔디밭 위에서. 끝없이 먼 곳까지 이어지는 새파란 하늘 아래에서.
돌연히 커다란 화음과 함께 곡이 가속하며 내 마음을 연
습 홀로 되돌려 놨다. ---p. 306